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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영 (18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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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대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하고, 조선군에서 복무하며 훈장을 받았으며, 1937년부터 1943년까지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 등에서 조선인의 병력 동원을 선전, 선동했다. 이러한 친일 행적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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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영 (1889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1889년 8월 20일
사망1976년 3월 1일 (86세)
출생지한성부
사망지대한민국
별명이대영 (李大永)
이호영 (李號永)
군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최종 계급소좌 (일본 육군)
준장 (한국 육군)
기타 정보
종교불교

2. 일제강점기 이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1909년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학교가 폐지되면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2. 1.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수학과 일본 유학

1909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일제의 압력으로 학교가 폐지되면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0년 일본 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한 후, 1912년에는 일본 제국 육군 제11사단 소속 보병 제12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근무했다. 이후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하였다.

3. 일제강점기 활동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1909년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지되자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했다.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복무했으며, 1921년에는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에 참전했다. 이후 조선군 등에서 복무하며 여러 차례 일본 정부로부터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조선군사후원연맹 주최 강연회 등에서 활동하며 노골적인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1940년부터는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와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종로익찬위원회 등에 참여하여 조선 청년들의 지원병학도병 지원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독려하는 등 침략 전쟁에 협력하는 활동을 펼쳤다. 1944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1. 일본군 장교 복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1909년 입학했으나 같은 해 학교가 폐지되면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0년 일본 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에 편입했다.[3] 이후 마루가메 보병 제12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근무했고,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보병 제12연대에서 12년간 복무했다.[3]

1918년 7월 29일 일본 제국 육군 보병 중위로 진급했으며[4], 1921년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에 파견되어 약 1년간 니콜리스크에서 수비대장으로 활동하며 러시아 혁명에 개입하고 현지 세력 토벌에 가담했다.[3] 1925년 3월 18일 보병 대위로 진급했고[5], 같은 해 9월 22일 보병 제73연대 대대 부관으로 임명되었다.[6] 1926년 7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3] 1927년 1월 29일에는 보병 제73연대 중대장이 되었고[7], 1928년 9월 21일에는 보병 제73연대 부(附)로 보직이 변경되었다.[8] 1926년부터 1933년까지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으로 함경북도에서 복무했다. 1930년 9월부터 10월까지는 쇼와 5년 국세조사에서 육군 조사원으로 활동했으며[3], 1931년 9월 14일 다시 보병 제73연대 대대 부관으로 임명되었다.[4] 1932년 10월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고[3], 1933년 7월에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3]

1934년 3월 5일 보병 소좌로 진급하여 보병 제75연대 부(附)로 발령받았으며[5], 같은 해 조선군사령부 부(附)로 옮겼다.[9] 1934년 4월에는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3] 1937년부터 1939년경까지 현역 소좌 신분으로 경성부 총무부 내무과 방공계 촉탁으로 근무했다.[3]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병력 동원을 선전하고 독려하는 등 노골적인 친일 활동에 가담했다. 1937년 조선군사후원연맹 주최 시국대강연회 강사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8월 경기도 강화를 방문하여 전시 방공 및 방첩 의식 강화와 총력 체제 확립을 주제로 강연했다. 또한 경성부 고등보통학교 부형회에서는 매일신보사가 제작한 중일전쟁 관련 뉴스를 상영한 후 시국 강연을 진행했다.[3]

1938년 7월에는 경성군사후원연맹이 주최한 북지사변(중일 전쟁) 1주년 기념 강연회에 정훈 소령 등과 함께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 협력과 조선인의 병력 동원을 선동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친일 단체인 동민회가 주최한 부인 강습회에서 "비상 시국의 정신 작흥과 심전 개발"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3] 1939년 11월에는 제2회 육군 병 지원자 퇴소식에 참석했다.[3]

1940년부터 1943년경까지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에 참여했으며, 1943년 11월에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종로익찬위원회에 참여하여 조선인 청년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원병으로 나설 것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독려했다.[3] 1940년 3월에는 경성 반도호텔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여 지원병 후원회 기금으로 10만을 모금하기로 결정하는 데 관여했다. 같은 해 5월에는 경성부 육군 지원병 후원회가 주최한 유지 간담회에 참석하여 지원병 제도 취지 홍보와 후원금 20만 이상 모금을 결의했다. 또한 윤치호, 조병상 등과 함께 퇴소를 앞둔 지원병 훈련병들에게 만찬을 베풀고 기념품을 전달하기도 했다.[3]

1941년 1월에는 경성부민관에서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열린 "육군 특별 지원병 취지 보급 강연"에 육군 소령 겸 경성부 육군 병 지원자 후원회 상임 이사 자격으로 참석하여 1,800여 명의 학생들에게 "지원병과 후원회"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3] 같은 해 12월 잡지 《삼천리》에 실린 대담에서는 "조선 청년들은 대동아 건설의 초석이 되어 세계 신질서 건설에 공헌하기 위해 상무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동원을 부추겼다.[3]

1942년 10월에는 경성부 육군 병 지원자 후원회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하여 명문가 자제들의 솔선 지원 방안과 1943년도 지원병 모집 계획을 논의했다.[3] 1943년 5월 제11회 육군 지원병 수료생 장도식과 같은 해 11월 제1훈련소 출신 지원병 장도식에도 참석했다.[3] 조선인 학도 특별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자, 1943년 11월 임시 특별 지원병 제도 종로익찬위원회에 참여하여 지원병 적격자 가정을 방문해 지원을 강력히 권유하기로 결의하는 데 동참했다. 이후 화신백화점에서 열린 회의에서 윤치호, 여운홍, 신필호 등과 함께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수은정 방면을 담당했다. 같은 달 임시 특별 지원병 경성익찬회에도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참석하여 학도병 장도식 개최 등을 결정했다.[3]

1944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3]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명단의 군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시키고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11] 위원회는 이대영의 행위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호("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제11호("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제19호("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와 침략 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3]

=== 수훈 내역 ===

훈장수여 연도
대례기념장1915년 11월[3]
훈6등 서보장1926년 7월[3]
국세조사기념장1932년 10월[3]
훈5등 서보장1933년 7월[3]
훈4등 서보장1934년 4월[3]


3. 2. 일제 식민 통치 및 침략 전쟁 협력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1909년 입학했으나 같은 해 학교가 폐지되면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0년 일본 중앙유년학교에 입학했다. 1912년 일본 제국 육군 제11사단 보병 제12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근무했고,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했다.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복무 중이던 1921년 시베리아 출병에 파견되어 약 1년간 니콜리스크에서 수비대장으로 활동하며 침략 및 마적 토벌에 종사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26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군 제19사단 소속으로 함경북도에서 복무했으며, 1933년에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4년 3월 5일 보병 소좌로 진급하여 보병 제75연대 부 소속이 되었고, 같은 해 조선군사령부 부 소속으로 근무했다.

1937년부터 1939년경까지 현역 소령 신분으로 경성부 총무부 내무과 방공계 촉탁으로 근무했다. 1937년 8월, 조선군사후원연맹 주최 시국대강연회 강사로 활동하며 경기도 강화를 방문하여 전시 방공 방첩 의식 강화와 총력 체제 확립을 주제로 강연했고, 같은 달 경성부 고등보통학교 부형회에서는 매일신보사가 제작한 중일전쟁 관련 뉴스를 상영한 후 시국 강연을 했다.

1938년 7월, 경성군사후원연맹이 주최한 북지사변(중일전쟁) 기념 1주년 강연회에 정훈 소령 등과 함께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 협력과 조선인 병력 동원을 선전·선동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친일 단체 동민회가 주최한 부인 강습회에서 "비상 시국의 정신 작흥과 심전 개발"을 주제로 강연했다.

1940년부터 1943년까지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陸軍兵志願者後援會)에 상임 이사로 참여하며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병력 동원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선동했다.

  • 1940년 3월, 경성부윤과 경기도 경찰부장이 소집한 회의에서 지원병 후원회 기금 30만 모집을 제안했으나 경성부윤의 반대로 10만으로 결정되었다. 5월에는 유지 간담회에 참석하여 지원병 후원 강화와 하루 500JPY 이상의 기부금을 모아 20만 이상의 사업 기금을 만들 것을 결의했다. 같은 달 윤치호, 조병상 등과 함께 지원병 훈련소 퇴소 예정자들에게 만찬을 베풀고 기념품을 전달했다.
  • 1941년 1월, 경성부민관에서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열린 육군 특별 지원병 취지 보급 강연회에서 180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지원병과 후원회"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 《삼천리》 1941년 12월호 대담에서는 조선 청년들이 대동아 건설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며 상무 정신 함양을 주장했다.
  • 1942년 10월, 경성부 육군 병 지원자 후원회 주최 간담회에 참석하여 명문가의 솔선 지원 방안과 1943년도 지원병 모집을 논의했다.
  • 1943년 5월과 11월, 육군 지원병 수료생 및 훈련소 출신 지원병 장도식에 참가했다.


1943년 11월, 조선인 학도 특별 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종로익찬위원회(臨時特別支援兵制度 鐘路翼贊委員會)에 참여하여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위원회는 "적격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극력 (지원병을) 권유하는 것" 등을 결의했으며, 이대영은 수은정 방면을 담당하여 활동했다. 같은 달 임시 특별 지원병 경성익찬회에도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참석하여 학도병 장도식 개최 등을 결정했다.

1944년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의 군 부문에 이름이 올랐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대영이 일본 육군 장교로서 시베리아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하고, 중일전쟁 이후 지원병 제도를 적극 선전·선동하여 조선 청년들을 침략 전쟁에 동원한 행위, 그리고 이러한 협력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행위 등을 근거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상의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서훈 내역'''

서훈명수훈 연도/월
대례기념장1915년 11월
훈6등 서보장1926년 7월
국세조사기념장1932년 10월
훈5등 서보장1933년 7월
훈4등 서보장1934년 4월


3. 3. 친일 행적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1909년 입학했으나 같은 해 학교가 폐지되면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0년 일본 중앙유년학교에 입학했다. 1912년 일본 제국 육군 제11사단 보병 제12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근무했고,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했다. 졸업 후 보병 제12연대에서 12년간 근무했다.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친일 행적을 쌓았다. 1918년 7월 29일 보병 중위로 진급했고, 1921년에는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에 파견되어 약 1년간 니콜리스크에서 수비대장으로 활동하며 침략과 마적 토벌에 가담했다. 1925년 3월 18일 보병 대위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9월 22일 보병 제73연대 대대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공로로 1926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군 제19사단 소속으로 함경북도에서 복무했으며, 이 기간 중 1927년 1월 29일에는 보병 제73연대 중대장, 1928년 9월 21일에는 보병 제73연대 부, 1931년 9월 14일에는 다시 보병 제73연대 대대 부관을 맡았다. 1933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4년 3월 5일 보병 소좌로 진급하여 보병 제75연대 부 소속이 되었고, 같은 해 조선군사령부 부 소속으로 복무했다. 1937년 조선군사후원연맹이 주최한 시국대강연회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강연을 했다. 1937년부터 1939년경까지 현역 소령 신분으로 경성부 총무부 내무과 방공계 촉탁으로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1937년 8월 경기도 강화를 방문하여 전시 방공 방첩 의식 강화와 총력 체제 확립을 주제로 강연했고, 같은 달 경성부 고등보통학교 부형회에 참석하여 매일신보사가 제작한 중일전쟁 관련 뉴스를 상영한 후 시국 강연을 진행했다. 1938년 7월에는 경성군사후원연맹이 주최한 북지사변(중일전쟁) 1주년 기념 강연회에 조선군 사령부 보도부의 정훈 소령 등과 함께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 협력과 조선인의 병력 동원을 선전했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친일 단체인 동민회가 주최한 부인 강습회에서 "비상 시국의 정신 작흥과 심전 개발"을 주제로 강연했다.

1940년부터 1943년경까지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陸軍兵志願者後援會)에 참여하며 조선인의 병력 동원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1940년 3월, 경성부윤과 경기도 경찰부장이 소집한 회의에 참석하여 조병상과 함께 지원병 후원회 기금 30만 엔 모집을 제안했으나, 경성부윤의 반대로 10만 엔으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5월, 경성부 육군 지원병 후원회가 주최한 유지 간담회에 현역 소령으로 참가하여 지원병 취지 홍보와 후원 기금 20만 엔 이상 조성을 결의했다. 같은 달, 윤치호, 조병상 등과 함께 퇴소를 앞둔 지원병 훈련소 훈련병과 사관들에게 만찬을 베풀고 기념품을 전달했다. 1941년 1월에는 경성부민관에서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하고 경성부 육군 병 지원자 후원회가 후원하는 "육군 특별 지원병 취지 보급 강연"에 육군 소령 겸 후원회 상임 이사로 참가하여 1,80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지원병과 후원회"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삼천리》 1941년 12월호에 실린 "출정 및 동경 육군사관학교 시대 회상" 대담에서는 조선 청년들이 대동아 건설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며 상무 정신 함양을 주장했다. 1942년 10월, 명문 가정에서 솔선하여 지원병을 내도록 독려하기 위한 간담회에 참가하여 1943년도 지원병 모집을 논의했다.

조선인 학도 특별 지원병제가 실시되자, 1943년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종로익찬위원회(臨時特別支援兵制度 鐘路翼贊委員會)에 참여하여 "적격자의 가정을 방문하여 극력 (지원병을) 권유하는 것" 등을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다음날 화신백화점에서 열린 회의에서 윤치호, 여운홍, 신필호 등과 함께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수은정 방면을 담당했다. 같은 달, 임시 특별 지원병 경성익찬회에 종로위원회 실행위원으로 참석하여 출진 학도의 장도식을 경성 전체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1944년경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명단의 군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대영의 행위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호(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제11호(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제19호(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와 침략 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하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시켰다. 위원회는 결정 이유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후 20년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였으며, 특히 1921년에는 시베리아 간섭 전쟁(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하여,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일본 정부로부터 1926년에 훈6등서보장, 1933년에 훈5등서보장을 받았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 경성부 육군 병 지원자 후원회와 임시 특별 지원병 제도 종로익찬위원회에 참가하여, 조선의 청년들을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지원병 제도를 적극 선전 선동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4. 해방 이후

한국 전쟁 당시에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준장으로 복무했으며 1951년 전라남도 계엄민사부장을 역임했다. 1960년 5월 4일부터 7월 15일까지 짧은 기간 동안 제7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맡았다.

4. 1. 대한민국 국군 장교 복무

1949년 육군사관학교 제8기 제4차 특별반을 졸업하고 위관급 장교로 임관했으나 바로 퇴역했다.[3]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복귀하여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으며, 전라남도 지구 병사구 사령관, 제주 지구 병사구 사령관, 충청남도 지구 병사구 사령관, 경기 지구 위수사령관 등을 역임했다.[3] 1951년에는 전라남도 계엄민사부장을 지냈고,[10] 1954년 4월 15일에는 경기도 지구 병사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3]

이후 육군 준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으며,[3] 1960년 5월 4일부터 7월 15일까지 제7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했다.[3]

4. 2. 재향군인회 회장 역임

한국 전쟁 당시에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준장으로 복무했으며, 1951년에는 전라남도 계엄민사부장을 지냈다. 이후 1960년 5월 4일부터 1960년 7월 15일까지 제7대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참조

[1] 뉴스 (5)韓国関係の学校((5)한국무관학교) http://isplus.live.j[...] 1982-11-01
[2] 뉴스 法制処長 李龍薰氏 援護処長 李種浩氏(법제처장 이룡훈씨 원호처장 이종호씨) http://isplus.live.j[...] 1980-05-23
[3]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 NDLDC 1920-09-01
[4]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 https://dl.ndl.go.jp[...] 1932-09-01
[5]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 https://dl.ndl.go.jp[...] 1934-09-01
[6]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 https://dl.ndl.go.jp[...] 1940-09-01
[7]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 https://dl.ndl.go.jp[...] 1928-09-01
[8]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 https://dl.ndl.go.jp[...] 1931-09-01
[9] 웹사이트 군부에 있는 조선인 사관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2015-10-31
[10] 웹사이트 양일봉 부산일보 특파원, 전라남도 상황을 보도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2015-10-31
[11] 뉴스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 http://www.ohmynews.[...] 2008-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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